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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 드 메디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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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왕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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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왕국 앙리 4세의 계비
마리아 데 메디치
Maria de' Medici
파일:Maria de_ Medici Frans Pourbus the Younger (detail).jpg
이름이탈리아어마리아 디 프란체스코 데 메디치
(Maria di Francesco de' Medici)
프랑스어마리 드 프랑수아 드 메디시스
(Marie de François de Médicis)
출생1575년 4월 26일
토스카나 대공국 피티 궁전
사망1642년 7월 3일 (향년 67세)
신성 로마 제국 쾰른
배우자앙리 4세 (1600년 결혼 / 1610년 사망)
자녀루이 13세, 엘리자베트[1], 크리스틴, 니콜라 앙리, 가스통, 앙리에트 마리[2]
아버지토스카나 대공 프란체스코 1세 데 메디치
어머니오스트리아의 요하나
형제엘레오노라, 안나, 필리포
종교가톨릭

1. 개요
2. 생애
3. 가족관계
3.1. 조상
3.2. 자녀
4. 기타



1. 개요[편집]


프랑스 왕국의 섭정 왕비이자 앙리 4세의 부인. 루이 13세의 어머니.


2. 생애[편집]


토스카나 대공국의 대공 프란체스코 1세 데 메디치오스트리아의 요하나[3]의 딸로 태어났다. 1600년 앙리 4세와 결혼해 여섯 명의 아이를 두었다. 이 결혼의 성사로 메디치 가문에게 엄청난 부채를 지고 있었던 부르봉 왕가는 어느 정도 재정적 부담을 덜 수 있었다. 질투심이 강하고 드센 성격이던 마리 드 메디시스는 호색한이였던 앙리 4세[4] 자주 충돌했고, 남편과의 관계가 나빠 결혼 생활은 순탄치 못하였다. 1610년 앙리 4세의 서거 이후 뒤를 이어 8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한 아들 루이 13세를 대신해 섭정을 맡았다. 마리 드 메디시스는 야망이 큰 왕비였으며 하급 귀족 출신의 콘치노 콘치니를 총신으로 앞세운 정치를 시도했지만, 포용력이 부족하고 방탕했던 콘치니는 프랑스 기존 정치 세력으로부터 원성을 샀다. 프랑스 귀족들은 이를 명분삼아 반발하고, 특히 콩데 대공, 앙리 2세는 마리 드 메디시스와 잦은 분쟁을 겪는다. 1617년 성인이 된 루이 13세는 자신에게 권력을 주지않는 어머니한테 불만을 품고[5] 비트리 후작 등, 자신을 지지하는 귀족들을 등에 업고 일종의 쿠데타를 일으켜 콘치니를 비롯한 모후의 총신들을 숙청하고, 모후에게 자신이 직접 프랑스의 왕으로 군림할 것을 선언한다.

이때 마리 드 메디시스는 블루아 성에 유폐되었으나 1619년에 블루아 성에서 탈출해 앙굴렘 성으로 피신해서 자신의 차남이자 루이 13세의 남동생인 오를레앙 공 가스통과 손잡아 반란을 일으켰다. 하지만 반란은 루이 13세의 반격으로 너무나도 맥없이 진압되었다. 그나마 루이 13세의 총신인 리슐리외 재상의 중재[6]으로 루이 13세와 화해하고, 오를레앙 공 가스통도 유배를 보내는 정도로 관대하게 용서받아 52살로 천수를 누렸다.[7] 그렇게 아들과의 갈등이 가라앉나 싶었으나 마리 드 메디시스는 재빨리 자신을 지지하는 귀족 세력을 모아 2차 반란을 일으켰다. 하지만 2차 반란은 퐁드세 전투로 빠르게 진압되었다. 이후 제3차 반란을 우려한 루이 13세는 모후인 마리를 궁전으로 불러들이며 리슐리외의 중재로 어머니와 일시적으로 화해했다.

파리로 재입성한 마리 드 메디시스는 모후로서 대접받았으나 권력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여 다시 정계로 발을 들이고 세력을 구축하려고 노력했다. 1630년 리슐리외 재상의 너무 강한 영향력을 눈엣가시로 여겨 왕에게 리슐리외를 내칠 것을 요구했다. 루이 13세는 이를 받아들이는 척하나 다음 날 리슐리외를 궁으로 불러들이면서 재상으로써의 자리를 공고히 해준다.(Journée des Dupes, 속임수의 날) 무엇보다 어머니가 여전히 권력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자 화가 난 루이 13세는 마리한테 당장 정치에 대한 관심을 끊을 것을 요구했는데 마리가 거부하자 격분하여 거부하면 가만있지 않겠다는 경고했다. 이로 인해 아들 루이 13세에게 버림받은 마리 드 메디시스는 당시 스페인령이였던 브뤼셀로 도망갔다. 당연히 크게 화가 난 루이 13세는 마리 드 메디시스가 프랑스의 원적인 스페인령으로 도망친 것을 이유로 삼아 자신의 모후인 그녀를 파문했다. 또한 어머니의 연금을 박탈하고 어머니의 지지자들을 찾아내서 모두 반역죄로 투옥시키거나 처형했으며 입국을 영구 금지시켰다.

이후에도 마리는 해외에서 군대를 빌려 프랑스를 침공할 기회까지 잡았으나 번번히 여러 사정으로 실패했다.[8] 결국 프랑스로 돌아오지 못한 채, 잉글랜드와 네덜란드를 전전했다. 1642년 7월 3일 쾰른 선제후국쾰른에서 과거 자신이 후원한 화가인 루벤스의 저택에서 늑막염으로 사망했다. 사망했을때의 나이가 67세로 당시로서는 상당히 장수한 편이었다. 그로부터 1년 사이에 그녀의 정적이었던 리슐리외루이 13세가 모두 사망했다.


3. 가족관계[편집]



3.1. 조상[편집]


본인부모조부모증조부모
마리아 데 메디치
(Marie de' Medici)
토스카나 대공 프란체스코 1세 데 메디치
(Francis I de' Medici, Grand Duke of Tuscany)
토스카나 대공 코시모 1세 데 메디치
(Cosimo I de' Medici, Grand Duke of Tuscany)
조반니 달레 반데 네레
(Giovanni delle Bande Nere)
마리아 살비아티
(Maria Salviati)
레오노르 데 톨레도
(Eleanor of Toledo)
페드로 데 톨레도 이 수니가
(Pedro de Toledo y Zúñiga)
제2대 비야프랑카 델 비에르소 여후작
마리아 오소리오 이 피멘텔
(María Osorio y Pimentel,
2nd Marquise of Villafranca del Bierzo)
오스트리아의 요하나
(Joanna of Austria)
페르디난트 1세
(Ferdinand I)
펠리페 1세
(Philip I)
후아나 1세
(Joanna I)
보헤미아와 헝가리의 언너
(Anna of Bohemia and Hungary)
울라슬로 2세
(Vladislaus II)
푸아캉달의 안[9]
(Anna of Foix-Candale)

3.2. 자녀[편집]


자녀이름출생사망배우자 / 자녀
1남루이 13세
(Louis XIII)
1601년 9월 27일1643년 5월 14일오스트리아의 아나[10]
슬하 2남[11]
1녀스페인포르투갈의 왕비 엘리자베트
(Elisabeth, Queen of Spain and Portugal)
1602년 11월 22일1644년 10월 6일펠리페 4세
슬하 1남 1녀[12]
2녀사보이아 공작부인 크리스티나
(Christine, Duchess of Savoy)
1606년 2월 10일1663년 12월 27일사보이아 공작 비토리오 아메데오 1세
슬하 2남 4녀
2남오를레앙 공작 가스통
(Gaston, Duke of Orléans)
1608년 4월 24일1660년 2월 2일몽팡시에 여공작 마리 드 부르봉
슬하 1녀
로렌의 마르그리트
슬하 1남 4녀
3녀잉글랜드,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의 왕비 헨리에타 마리아
(Henrietta Maria, Queen of England, Scotland and Ireland)
1609년 11월 25일1669년 9월 10일찰스 1세
슬하 3남 4녀[13]


4. 기타[편집]


  • 아들 루이 13세의 섭정을 맡은 이후 후원하던 화가 페테르 파울 루벤스에게 자신과 자신의 일생을 소재로한 "마리 드 메디치 연작"을 그리도록 했었다. 하지만 자기 돈으로 후원하던 사람에게 자기 입맛에 맞는 그림을 그리라고 하다 보니까 실제 역사와는 왜곡이 심한 편이다.

본인이 섭정을 하게 된 걸 신의 뜻이라고 하는 건 기본이고 실제로는 마리가 결혼을 하러 오든말든, 관심도 없었던 앙리 4세가 그녀를 환대해 줬다든가 하는 내용에다가 앙리 4세가 그녀를 보고 첫 눈에 반하는 그림도 있다. 해당 그림은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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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펠리페 4세의 첫번째 왕비.[2] 잉글랜드 찰스 1세의 아내.[3]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오스트리아 대공이었던 페르디난트 1세의 막내딸이었다.[4] 앙리 4세는 호색왕(Le vert galant)이란 이명을 지닐 만큼 여자를 어마무시하게 밝혔던 걸로 유명하다. 특히 마리는 외국인이다보니 프랑스의 개방적이고 문란한 성문화를 이해하지 못하여 앙리 4세와의 관계가 나쁠수 밖에 없었다.[5] 어머니가 권력을 독점한것도 있지만 게으르고 놀기 좋아하는 루이 13세를 좋게 보지않아 채찍으로 때릴 정도로 엄격하게만 대했고 동생인 가스통을 편애하였기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한테 불만이 가득 쌓여 있었다.[6] 앙굴렘 협정[7] 다만 가스통은 왕위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터라 루이 13세의 재위 기간 동안 감시받았고 루이 13세가 죽고 나서도 왕이 되기 위해 프롱드의 난에 가담했다가 패하여 체포되었다. 결국 가스통은 블루아 성에 감금되어 죽을 때까지 나오지 못하고 그곳에서 사망했다. 말이 좋아 천수를 누린 거지 사실상 죽을 때까지 죄인 취급을 받으며 성에서 감금당한 채 감옥 살이를 하며 살다가 옥사한 것이다.[8] 사실 말년에 가면 아들과의 사이를 회복하고 싶어서 후원자들을 통해 화해를 주선하며 프랑스로 돌아오려고 했으나, 이미 어머니에 대한 불신과 불만이 가득했던 루이 13세는 끝까지 마리를 용서하지 않고 어머니의 입국과 화해를 거부한 터라 돌아오지 못했다.[9] 레오노르 여왕의 외손녀이다.[10] 펠리페 3세의 장녀이다.[11] 루이 14세,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1세[12] 프랑스 왕비 마리 테레즈[13] 찰스 2세, 메리, 제임스 2세 & 7세